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유시 참변 (문단 편집) === [[극동 공화국]] 현지 군인의 무장해제 요구와 독립군의 선택 === 간도 독립군들이 [[시베리아]] 극동으로 피난을 오자 현지 극동 공화국 인민혁명군은 몰려오던 한국독립군을 “정치적 이민자”로 규정하며 '무장해제'하라고 단호하게 요구했다. >하바롭스크 시 >1921년 1월 3일 > >1 >남쪽에서부터 중립지대를 거쳐 왔거나 중국 영토로부터 왔거나 제2아무르군 관할지역에 온 모든 한인부대를 즉각 무장해제할 것을 명령한다. 이 경우 무력이라는 가장 단호한 수단도 동원 가능하다. 무장해제는 완벽히 이루어져야 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총포류나 도검류를 하나라도 남기지 않는다. > >2 >한인 무장부대를 무장해제한 후에 구역 책임자들은 한인들이 자유시민의 완전한 권리를 향유하는 정치적 이민자로서 갖는 일반 권리에 의거해 스스로 자신의 거주 장소로 선택한 먼 후방으로 이동시키기 위한 차량이나 마차들을 즉각 요청한다. > >3 >무장해제를 실행하는 책임자들은 즉각 모든 무기를 목록화 하여 각 사단이나 제2군의 포병보급 부서로 보낸다. > >제2군 사령관 쇼리쉐프 >정치위원 멜니코프 >군참모장 임시 직무대리 뷔로프 >원본 확인: 작전관리국장 > >---- >이완종, 2014, 『러시아문서 번역집 14』,선인, 52~53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singlebungle1472&no=866282|원본과 번역본 사진]] 그러나 일부 한국독립군들은 제2군을 무시하고 무기를 갖고 넘어가려고 했다. 독립군의 위기라서 '''타국의 영토를 이동하는 처지면서 일부 독립군은 현지 지휘관의 무기 양도 요구를 거부하고 [[시베리아]] 극동에 들어가려고 했다.''' 독립군이 현지 지휘관의 요구를 거부하면서 [[시베리아]] 극동에 접근하자 제2군사령관은 단호하게 차단하며 한국 독립군에 대한 조치를 중국마적(홍후즈)에 대한 조치와 동일하게 취급했다. 중국마적(홍후즈)과 마찬가지로 한국독립군도 절대 현지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막으라고 명령하며 현지 영토로 이주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 있을 경우에는 통행 허가에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미 지역에 들어온 독립군에게는 '''무장해제 거부할 거면 여기로 오지 말고 만주로 가라고 요구했다.''' >하바롭스크 시 >1921년 3월 9일 > >1 >한인부대들이 무기 양도를 거부할 경우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그들을 즉각 무장해제하라는 금년 1월 3일자 제2아무르군 각 부대에 대한 명령18호를 반드시 집행할 것을 확인한다. '''만약 한인부대들이 무기 양도를 단호히 거부한다면 군사활동을 개시하여 길을 차단하여 그들이 우리 쪽으로 넘어오는 것을 용인하지 말라. 반대의 경우, 그들에게 우리 군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떠나라고 제안하라.''' > >2 >아무르 국경지대에 출현한 무장 홍후즈 부대들이 우리 쪽으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무력 동원을 포함한 가장 단호한 조치를 취하라. 한인 부대들에게 대해서도 그 지도부에 동일한 조치를 취하라. 우리 영토로 이주하고 싶다는 그들의 간절한 바람이 있을 경우, 범죄분자들이 유입되지 않도록 통행 허가에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각 경우에 관해 군사령부에 즉각 알려야 한다. > >제2군사령관 파블로프 >군정치위원 멜니코프 >군참모장 쉬콜린 >원본 확인: 작전관리국장 >---- >이완종, 2014, 『러시아문서 번역집 14』,선인, 54~55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singlebungle1472&no=866282|원본 번역본 사진]] 이런 실랑이 끝에 결국 [[김좌진]]·[[서일]]·[[이범석]]·나중소 부대는 다시 만주로 되돌아갔다. '''되돌아가지 않은 군인들은 자유시로 이동했고''' 이후 양도했던 무기들을 되돌려받았다.[* 윤상원, 2010, 170~171] >이만에서 자유시로 이동할때 홍범도, 이청천, 김승빈 등 500여 독립군은 앞서 최진동, 안무 부대가 그랬듯이 절차대로 이동 후(1921. 3월 중순) 무기를 되돌려 받았다. 그러나 북로군정서계 서일, 김좌진, 이범석, 나중소 부대는 무장해제에 반대하여 만주로 되돌아갔다.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 서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7, 95-96쪽 [[https://www.imhc.mil.kr/user/indexSub.action?codyMenuSeq=70543&siteId=imhc&menuUIType=top|#]] 현장의 극동 공화국 인민혁명군이 간도 독립군의 이동을 차단하고 있었을 때 이르쿠츠크파 오하묵은 간도 독립군에 대한 구호활동을 펼쳤다. 이르쿠츠크파 오하묵은 '우리 간도 한국인 부대의 러시아 통과를 허용할 것', '간도부대에 신속히 피복, 침대보, 구두 1000세트를 내어줄 것'을 극동 공화국에게 간곡하게 요청하며 간도 한국인 부대에 대한 구호활동을 펼쳤다. >극동 공화국 전군 총사령관 귀하. > >보고 > >1921년 2월 4일자 본인의 보고 제15호에 추가하여 귀하에게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해주실 것을 강력히 요청합니다: >(중략) >4) 연해주 이만 시 반대편 중국 영토에 숙영하고 있는 제2간도빨치산부대는 자신의 대표자를 통해 한인대대로 합류하겠다고 표명하였으며, 편성되는 연대의 충원을 위해 '''이 부대가 러시아 영토로 들어오는 것을 허용할 것.''' >5)(북중국에서) '''도착하는 간도빨치산부대들에의 군장품 지급을 위해 제2아무르군 보급본부로부터 신속히 피복, 침대보, 구두 1,000세트를 내어줄 것.''' > >한인대대장 겸 스바보드니 시 수비대장 오가이-오하묵 >1921년 2월 22일. 제(판독불가)호 >---- >이완종, 2014, 『러시아문서 번역집 14』,선인, 2014, 145-146쪽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singlebungle1472&no=866282|원본 번역본 사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